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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브리사를 아십니까?

기아차는 창업 30주년이 되던 1974년 10월에 자동차산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국내 첫 승용차 ‘브라사’를 완성했다.

배기량 1000cc의 소형 승용차 브리사는 1970년대초 세계경제를 강타한 오일쇼크에 대응하고, 정부의 국민차 생산계획에 부응하기 위해 개발된 차량이었다.
 
당시 기아는 현대와 GMK(새한/대우)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가장 먼저 정부가 요구하는 국산화율을 달성, 국민차시대의 선두주자가 되었던 것이다. 브리사가 달성한 국산화율은 개발 첫해에 63.01%, 다음 해인 1975년에는 77.83%, 1976년에는 89.47% 였다.

 
브리사는 출시되자마자 소비자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1975년도 한 해에만 1만대 이상이 판매되었고, 승용차시장의 51.2%를 점유하는 놀라운 실적을 보여주었다.
 
1976년에는 1300cc모델인 브리사2가, 1978년에는 웨곤형 모델이 각각 생산되었다.
 
기아는 브리사를 통해 매년 1만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최신 인기차종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브리사는 70년대 해외의 기술 흡수기를 마무리 짓고 1980년대 봉고-프라이드를 잇는 기술 개량의 상징적 의미도 갖고 있는 차다.
 
 
이같은 브리사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1981년, 정부는 2.28조치로 기아차의 승용차 생산을 금지시킨다.
 
2.28조치는 제2차 오일쇼크와 1970년대 말 투자과열에 따른 경영악화를 이유로 승용차 생산을 금지시키고 동아자동차와의 합병을 강요한 조치다.
 
이렇게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브리사는 기아차의 대표적인 차종으로 7만대 가까이 판매되었다.
 


‘브리사’ 탄생

브리사의 주요 제원은 길이 3875mm, 폭 1540mm, 높이 1399mm, 중량 790Kg, 총배기량 985cc, 최고속도 140Km/h였으며 처음 출고 당시의 가격은 159만 9000원이었다. 첫해에는 판매 대수가 22대에 불과하였으나, 다음 해에는 1만 757대로 폭발적인 신장세를 보여 1975년도 승용차 시장점유율 55.12%를 차지, 국민차시대의 총아로 등장하였다.

브리사의 어원은 라틴어로 ‘산들바람’을 뜻한다.

1976년 11월부터 발매가 시작된 1300cc 브리사2는 브리사I의 실용성과 경제성에 안정성과 쾌적성을 가미하여 고급 세단을 소비자들에게 공급한다는 데 개발목표가 있었다.

당초 브리사2의 차명은 레나(RENA)로 명명되어 있었는데 신차발표에 즈음하여 기존의 브리사의 이미지를 계승할 수 있는 차명이 소비자들에게 친숙감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브리사2로 결정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브리사2의 개발은 경쟁사인 현대차 포니의 등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기아차는 기존 브리사의 발매가 시작된 이후 포니가 출하되어 추격전을 전개하자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차종의 개발을 강구, 1975년 초부터 1300cc인 브리사2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브리사II는 직렬 4기통 1300cc엔진을 탑재하였는데 이 엔진은 유럽, 미국, 일본 등지에서 전통적으로 애용되던 엔진으로 성능과 경제성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또한 4도어에 후륜구동 타입이며, 4단 수동 변속기의 동력전달계통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1978년 11월에 개발된 브리사II 웨건은 레저와 비즈니스 겸용으로 설계돼 승용차의 안락감과 화물차의 경제성을 함께 지닌 실용적인 승용차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웨건형 모델은 내수보다 해외에서 더욱 인기가 있었다.

또한 기아차는 1979년 오일쇼크 대응책으로 브리사2에 디젤엔진을 탑재하는 상용화 연구에 돌입했다. 디젤 브리사는 양산 제조단계에서 1981년 정부의 2.28조치로 인하여 빛을 보지 못했다.

[사진/글 원문 제공 기아자동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