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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가 폭스바겐을 삼켰나, 혹은 그 반대인가?

포르쉐와 폭스바겐에 대해 잘못된 정보가 국내 인터넷에 팽배했습니다. 항상 한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미뤄오다 이제야 글을 쓰게 됩니다. 

자칫 지루한 얘기가 될 수 있겠는데, 폭스바겐그룹은 이제 도요타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회사가 됐으니 자동차 마니아라면 반드시 알아둬야 할 내용일 겁니다.

그동안 국내 언론 보도를 접하신 분들은 "포르쉐가 폭스바겐을 인수하려 하다가 재정상태가 악화돼 폭스바겐이 거꾸로 포르쉐를 인수했다"고 알고 계신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정보입니다. 좀 복잡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일부 기자들이 실수 했던 부분이고, 아우디폭스바겐코리아 측도 굳이 사실을 밝히기 꺼려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회사들의 관계는?

우리가 '포르쉐'라고 말하는 회사는 사실 포르쉐 자동차를 생산하는 포르쉐AG입니다. 풀어서 쓰면 Dr. Ing. h.c. F. Porsche AG라고 씁니다. 한국어로 하면 '페르디난드 포르쉐 박사의 포르쉐 회사'입니다. 너무 길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포르쉐AG라고 씁니다.

포르쉐AG의 모기업은 일반적으로 포르쉐SE라고 쓰지만, 이 회사명은 사실 '포르쉐 오토모빌 홀딩 SE(Porsche Automobil Holding SE)'를 줄인 말입니다. 이름이 말해주듯 포르쉐의 지주회사입니다. 

우리가 그냥 폭스바겐이라 말하는 회사는 '폭스바겐 승용차' 회사로 폭스바겐AG의 자회사입니다. 폭스바겐AG는 폭스바겐 외에도 아우디, 람보르기니, 벤틀리, 부가티 등을 모두 갖고 있는 회사입니다.


폭스바겐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 메이커지만, 2005년까지는 <국민차 법(Volkswagen law)>으로 불리는 독일 작센주 법에 따라 주식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20%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특정 이익집단이 차 가격을 높이거나 국민들을 위한 자동차를 만드는 것을 꺼리게 될 것을 우려한 합리적인 법률이었습니다. 

아무도 먹지 못하는 '그림의 떡'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로인해 반작용도 있었는데, 직원들이 급변하는 세계 자동차 시장에 걸맞게 빠른 의사결정을 한다거나 노력을 하지 못하고, 말하자면 '공무원화' 되어간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사람의 관계는? 포르쉐 회장이 곧 폭스바겐 회장

포르쉐SE라는 지주회사는 포르쉐의 외손자 피에히(Dr. Ferdinand K. Piëch)와 포르쉐 직계 가문이 거의 대부분의 주식을 갖고 있는 포르쉐 가문의 패밀리 비즈니스 업체입니다. 따라서 포르쉐AG의 사장이 제 아무리 바뀐다 해도 포르쉐의 주인은 피에히와 그 가족들입니다.

그런데 이 '포르쉐'의 실질적 주인인 피에히는 1996년부터 2002년까지 폭스바겐AG의 사장을 맡았고, 현재까지도 이사회의 의장(Chairman of supervisory board), 일반 기업으로 치면 '회장'을 맡고 있는 인물입니다. 

피에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고, 비록 이사회 의장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폭스바겐 지분도 얼마 없고, 폭스바겐 법에 의해 의결권도 얼마 없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피에히 폭스바겐AG 의장. 포르쉐SE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중동이 폭스바겐을 인수할지 몰라! 내가 지켜줄게 

수십년간 문제없이 진행되던 <국민차법>은 2000년 들어서부터 큰 변화를 겪습니다. 중동 자본이 폭스바겐을 인수할 것이 우려되면서 폭스바겐을 지킬 수 있도록 의결권 제한을 없앨 것이 공론화 됐습니다. 만일 대주주가 있어 "주식 안판다"고 해버리면 문제가 없지만 수많은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인물들이라면 회사를 넘길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였습니다.

피에히를 주축으로 한 폭스바겐 이사회가 방어를 명분으로 의결권 제한을 없앨 것을 작센주정부에 끊임없이 요구하자, 결국 의결권 제한이 폐지될 것으로 가닥이 모아지게 됩니다. '그림의 떡'이던 폭스바겐이 누구나 탐낼만한 회사로 거듭난겁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피에히와 포르쉐 일가는 먼저 포르쉐AG의 지분을 모두 사들여 100% 자회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더니 같은해 10월에 폭스바겐 주식 18.5%를 인수합니다. 이듬해 지분을 25% 까지 인수하면서 폭스바겐의 대주주가 되었습니다. 

이는 주식시장을 통한게 아니라 폭스바겐AG의 동의를 통해 주식을 추가로 발행해 싯가보다 저렴하게 넘겨주어 가능했던 것입니다. 주식을 구입하는 피에히가 동시에 주식을 판매하는 폭스바겐 의장으로 있었고, 주식 발행과 가격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까요. 이같은 행위에 깜짝 놀란 독일 정부의 몇몇 위원들은 부적절한 일이라고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인수 시나리오는 이미 진행 됐습니다.

포르쉐SE가 인수한 폭스바겐AG의 의결 주식은 지난해까지 50.74%에 달합니다.  

포르쉐SE의 매출은 2003년에는 55억유로, 2007년에는 73억유로로 조금 늘었을 뿐이지만, 2005년부터 사들인 폭스바겐 주식 가격이 큰폭으로 상승하는 덕에 2003년에는 연간 9억3천만유로였던 순수익은 2007년들어 연 58억유로(약 8조4천억원)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또, 의장이면서도 의결권이 없던 피에히는 폭스바겐 전체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큰 손'으로 거듭났습니다. 포르쉐SE가 아니라 사실상 포르쉐와 피에히 집안이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 기업인 <폭스바겐 그룹>을 인수한 셈입니다. 


폭스바겐이 포르쉐를 인수? 사실은…

폭스바겐이 포르쉐를 인수했다는 식의 감성적 기사는 유독 한국에만 있습니다. 다른나라 언론들은 포르쉐가 폭스바겐의 의결 지분을 인수했다는 '팩트'를 보도하거나 통합(merge)을 진행한다는 정도로 표현하지요.

왜 한국 보도는 이렇게 나오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선, 포르쉐SE가 폭스바겐 인수과정에서 돈을 엄청나게 썼고, 그 후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나왔다는 점에서 이같은 잘못된 인식이 나온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포르쉐SE는 2005년 이후 사상 최대의 흑자를 내는 기업입니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포르쉐AG를 위해 구제금융이 필요한건 아니었겠죠. 아마 포르쉐SE가 폭스바겐AG의 대주주이기 때문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을겁니다. 

또 폭스바겐이 돈을 내서 포르쉐의 지분을 인수할 계획이라는 발표도 이같은 추론을 가능케 했을겁니다. 이 경우도 '폭스바겐이 포르쉐를 인수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피에히 가문이 돈을 넣고 그 수익을 거둬들인다고 보는게 맞겠지요. 

설명하자면, 지금 폭스바겐이 포르쉐의 지분을 인수한다 해도 어차피 한 회사라서 인수 피인수의 개념을 떠난 상황입니다. 폭스바겐이 포르쉐 지분을 인수하면 상호출자(순환출자)라고 과거 한국 재벌기업들이 쓰던 방식이 되는데, 지분 구조상 피에히와 포르쉐 가문들의 지배력은 약화되지 않습니다. 양쪽 회사가 서로의 지분을 가지면 굳이 큰 돈 들이지 않고도(지분 비율을 줄이면서) 기업의 지배력은 유지할 수 있어, 오너는 오히려 자산과 현금유동성을 갖게 됩니다. 말하자면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게 되는거죠.

무엇보다 폭스바겐은 아직까지 포르쉐의 지분을 전혀 인수하지 않았는데, 계획상으로는 2011년에 합병을 이룬다 하니, 이를 진행하기 위해 내년에는 폭스바겐이 포르쉐 쪽과 지분을 어떻게든 나누게 될겁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상호출자는 법적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아마 신규로 만들어질 지주회사의 지분을 공동출자 하는 방식을 택하게 될 겁니다. 

포르쉐가 인수한거야 폭스바겐이 인수한거야?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폭스바겐이 포르쉐를 인수한거야? 포르쉐가 폭스바겐을 인수한거야?" 하고 묻는다면. 우문이라는 것을 아실겁니다.

지분구조로 보면야 포르쉐SE가 폭스바겐AG를 인수했다는 형식이지만, 포르쉐는 원래부터 패밀리 비즈니스였고 폭스바겐도 그 패밀리 비즈니스에 편입하기 위한 일이었으니까요. 시장에서 물건을 사듯 누가 누구를 산게 아니라 위에 계신 분 결정에 따라 두 회사가 통합된거지요.

답을 말씀 드리면 이 두회사의 상호 지분구조와 관계 없이 피에히-포르쉐 가족이 쥐고 흔들 수 있는 회사가 된 겁니다. 마치 현대차와 기아차가 서로 어떤 지분관계를 갖든 정씨일가가 운영하는 회사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