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맘먹고 새파란 셔츠를 사서 입고 나간 날에 주변에는 온통 파란 셔츠 입은 사람밖에 없다.
시승차를 몰고 나가도 그렇다. 내가 포드를 시승하고 있으면 보기 힘들던 포드차도 수두룩하고, 메르세데스벤츠를 끌고 다닐 때면 도로가 메르세데스의 밭이다.
그렇지만 재규어 XK를 몰고 나갔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주변에 이 차와 닮은 차는 물론 그림자 조차 비슷한 차가 없었다. 재규어를 몰던 며칠간은 내가 유니크하다는 느낌을 한순간도 잊을 수가 없었다.
독특한 실루엣이 매력적인 차. 재규어XK를 살펴보자.
디자인 & 실내
전체적인 실루엣은 제임스본드가 타던 애쉬턴 마틴을 닮았다.
제임스 본드가 타는 차는 어떤 디자인이어야 할까? 본드걸이 반할만한 날렵한 근육질이면서도 나비넥타이 정장을 입고 운전해도 잘 어울리는 점잖음이 배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포르쉐의 옆자리에서는 숏커트의 미니스커트를 입은 발랄한 여성이 앉는 것이 어울리겠지만, 이 차 옆좌석에는 우아한 드레스의 여성이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다.
차의 뒷부분으로 흐르는 라인은 감동적이다. 일찌기 곡선만으로 이렇게 아름답고 우아하게 보이는 차는 없었다.
사이드라인은 포르쉐 타르가 신형을 연상시키지만, 개발 순서는 이쪽이 먼저다.
쿠페의 커다란 문을 열고 실내에 들어서면 벤틀리의 실내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길게 뻗은 대시보드는 베이지색 가죽에 촘촘한 박음질로 마무리해 고급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반짝거리는 우드트림은 적절한 색상과 광택으로 중용의 미를 표현한다.
핸들에 붙은 오디오 조절레버도, 시가잭도 금속제로 만들어져 반짝이는데 역시 대단한 사치다.
화려하면서도 튀지 않고 전체가 어울어지도록 만드는 디자인 감각이 놀랍다.
이 차를 처음타면 도어록을 푸는 버튼을 찾을 수가 없다. 크롬으로 반짝이는 도어 손잡이가 반쯤 눌려 있으면 잠기고 반쯤 당기면 록이 풀리는 구조다.
메르세데스벤츠 마냥 전동 시트를 조절하는 버튼들이 문에 붙어있는데, 특이한 점은 공기 주입식 사이드 서포트의 조임을 조절하는 레버가 달렸다는 점이다. 사이드 서포트를 높이면 상당한 수준의 버킷시트가 되고, 체격에 따라 편안하게 풀어줄 수 있도록 했다.
기어노브는 위치가 좋은데, 동작이 크고 클래식한 느낌이다. L게이트를 적용해 맨 아래로 내려 왼편으로 옮기면 스포츠 주행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스위치를 최대한 없애 시트 열선이나 핸들 열선 등의 기본적인 기능도 센터페이시아의 터치스크린을 이용해 조절하도록 했다.
59년 동안 준비된 만찬
국내에서 같은 이름으로 가장 오래 판매된 차량은 쏘나타로 17년전인 1989년에 처음 그 이름을 선보였다.
최초의 재규어XK를 찾기 위해선 역사를 무려 59년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XK는 1948년 런던 모터쇼에서 처음 발표됐다. XK120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3.5리터 직렬 6기통 DOHC XK엔진을 장착해 시속 214km까지 달릴 수 있어 당시 세계 최고 속도를 기록했다.
1961년의 'E타입' 또한 참신한 스타일링과 모노코크라는 획기적인 기술을 도입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2대 한정 생산한 알루미늄 바디, 알루미늄 엔진의 '라이트웨이트 E타입'은 오늘날 XK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물론 당시에는 메르세데스벤츠 300SL, 애쉬턴마틴DB4, 페라리250GT 등 이름만으로도 벅차오르는 스포츠카들의 전성기이기도 했지만 재규어는 가볍고 손에 닿을 수 있는 가격으로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사람이 해가 갈 수록 연륜이 더해지듯, 차량도 해가 갈 수록 뭔가 발전해가기 마련이다. 59년의 역사가 빚은 최신 스포츠쿠페. XK를 만나봤다.
차체의 특징
재규어XK는 과거부터 이어 내려오는 알루미늄 바디라는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아우디의 A8등 일부 모델이 알루미늄 스페이스프레임을 사용하고 있지만, 재규어는 알루미늄을 사용하면서도 모노코크로 구성하고 있다. 알루미늄은 생산 공정 제작 비용이 월등히 많이 들기 때문에 XK같은 소량 생산 모델에 알루미늄을 채택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무척 반갑다.
디자인이 역사적인 재규어의 E타입과 무척 많이 닮아있다. 클래식한 형태의 그릴이며, 실내의 우드며 좌우로 곧게 이어지는 대쉬보드 패널의 디자인이 무척 고전적이다.
뒷좌석에 성인이 온전히 앉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좌석의 형태를 갖춰 놓았다.
트렁크의 공간은 괜찮은 편이다.
박진감이 넘치는 주행
4.2리터의 V8엔진은 평상시에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지만, 일단 엑셀을 밟으면 "V8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겠다"고 으름장 놓는듯 그르렁거린다. 매우 점잖으면서도 그 질감은 미국의 머슬카를 연상시키는 배기음인데, 저음 위주라서 운전자에게 달리기를 종용하는 힘이 느껴진다.
304마력에 42.9kgm의 토크, 6단 AT가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순식간에 제한속도 250km/h에 이른다.
이 차는 엔진룸 한 가득 4.2리터 엔진을 싣고도 몸무게는 1690kg 밖에 나가지 않아 아반떼(1650kg)와 비슷한 수준이다.
서스펜션은 바닥이 느껴지지 않는 고급스러운 주행감각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가파른 와인딩 로드도 쏠림 없이 빠져 나간다. 두마리 토끼를 잡는 놀라운 재주다.
편안한 스포츠카를 타보니
XK는 대단히 만족스럽게 달려주지만, 차 자체를 운전하는 것에 몰두해야 하는 거친 스포츠카의 주행감은 아니다.
포르쉐가 서 있어도 빨리 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차라면, 이 차는 편안하고 넉넉하게 달리는 와중에 속도계가 어느새 시속 200km를 훌쩍 넘어가버리는 타입이다.
이 차는 용광로 같이 발끈하는 차가 아니고 오랜 연륜과 뛰어난 드라이빙 실력으로 옆좌석 승객까지 배려하는 편안함과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차다.
어느 쪽이든 달리는 것이 기분 좋아지는 것은 분명하다.
패키징: ★★★★★
패션은 돌고 도는 법. 클래식을 되살리는 시도가 놀랍다. 복고적인 자동차를 초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차를 타는 기분.
실루엣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엔진성능: ★★★★★
4.2리터 V8엔진은 분명히 당신을 기쁘게 할 것이다. 한번만 경험해봐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조향성능: ★★★★
이 차는 포르쉐가 아니다. 다리 이음매를 통과할때도 아무 느낌 없이 편안하다. 그런데도 코너를 잘 돌아 나가는 것은 대체 무슨 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