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릴적 보던 애니메이션은 죄다 일본 것이었지요.
여러가지 있지만 그 중 마징가제트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TV를 통해 마징가제트를 보신 분들은 대부분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초 정도에 보셨을텐데.
사실 마징가제트는 일본에서 방영이 시작된게 72년이고 74년에 끝나버린 로봇물입니다.
불과 2년만에 마징가제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로봇이 죽다니) 끝나버렸지만
이 만화는 로봇물의 기본 철학을 바꾼 역사적 만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로봇은 타는게 아니라 지성을 가진 생명체 같은 존재였습니다.
부르면 오거나 때로는 약간 조종하는 정도의 형태였지요.
60년대 '철인28호'나 마징가 제트보다 몇개월 앞서 방영된 '짱가'처럼
강력한 존재로 그려지며 어디선가 짜짠~ 하고 나타나 주인공을 도와주는 겁니다.
마치 어린이에게는 아빠나 엄마 같은 존재, 도움을 주는 절대적인 조력자의 역할을 했지요.
어린이 입장에서나 어른 입장에서도 이게 자연스런 상상이었을 것 같아요.
후우.. 짜짜짜짜짜짱가... 라니.
(얼굴이 살색인 이유는 이 로보트가 '바이오 로보트'라서...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나쁜 놈들이 희한하게 얼굴은 안때려요 )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주인공 어린이는 짱가의 가슴의 팬던트 속에 숨기도 하지만
평소는 짱가가 손에 들고 날아다니고, 짱가의 교훈적인 발언을 매일 새겨듣는, 어디까지나 짱가와는 별개의 존재입니다.
반면 마징가제트-그레이트마징가-그랜다이저 시리즈는 이런 로봇들과 달리
주인공이 직접 로봇의 머리에 들어가 로봇을 자유자재로 움직였으니 어린이들이 얼마나 열광했겠어요.
말하자면 아빠 엄마가 내 조력자가 아니라, 내가 아빠 엄마를 조종하는 진정한 주인공이 되는거지요.
당시 마징가제트가 얼마나 인기였는지 이후 일본 로봇물은 상당수가 주인공이 로봇에 타서 조종하는 방식으로 바뀌긴 했습니다만,
일본 만화가들은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는지, 혹은 더 좋은 만화를 그리고 싶어서였는지
마징가제트를 외관을 직접 베끼거나, 유사하게 만드는 경우 조차 절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로봇태권브이는 '우리 것'이라고는 했지만 무슨 배짱인지 일본의 마징가제트를 철저히 모방해 만들었지요.
당시 태권브이는 편마다 모양과 비율이 제각각이어서 명확한 형태도 없고,
당연히 프라모델도 제대로 된게 없었는데
지금 와서 재현된 태권브이를 살펴봐도 (많이 개성을 넣었겠으나) 마징가제트와 비슷해도 너무 비슷합니다.
물론 로봇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위 사진은 로봇들의 제원상 크기를 그려놓은 비교표입니다만, 이 많은 일본 로봇중에 마징가제트와 비슷하게 생긴건 그레이트마징가와 그랜다이저 밖에 없습니다. ( 왼편 아래에 있습니다. 20미터 이내로 다른 로봇들에 비해 아주 작지요. )
심지어 로보트태권브이의 기계적인 형태나 무기 종류 등을 비롯해 스토리와 에피소드, 악당의 설정 등이 모두 굉장히 비슷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인체 비율이나 기계 작화 수준이 너무 떨어지는, 아픈 역사의 산물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태권브이가 처음 등장한 1976년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이 판치던 상황으로, 우리TV에서 수입만화만 보여주면 곤란하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때마침 태권도를 소재에 넣은 국산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TV 방영이나 극장 상영 등에선 '국산품'이라는 이미지가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금 베꼈더라도, 조금 엉성하더라도 어쨌든 나라 발전을 위해 상영한다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김청기 감독은 태권브이의 엄청난 성공에 힘입어 반공만화인 똘이장군 시리즈를 만들어 TV에 상영하는 등 다양한 만화를 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물론 수많은 표절시비에도 불구하고 조종사가 태권도를 하면 그대로 로봇이 움직여진다는 등 마징가제트와 다른 독창성이 일부 있었고 지금 세계적 수준인 우리의 만화산업을 일으킨 시초라는 점에서 평가할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역시 창피한 것은 상당수 일본인들은 태권브이를 알고있고 때때로 한국인을 놀리는 소재로도 사용해왔다는 점입니다.
...이런식으로 사용한다는건 말도 안되는겁니다.
일부 일본인들은 바로 이 태권브이를 마징가제트 아류작이라고 보고 있고, 다른 일본인들도 저 로봇을 보면 당연히 마징가제트의 짝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걸 독도에 세운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결국 일본 로봇이 독도로 들어간것과 다름없다고 볼 수도 있을겁니다.
그러면 백번 양보해서 태권브이를 우리 정통의 무엇이 깃든 것, 아니면 역사적 전통이 있는 무엇. 이라고 봐야 한다면. 태권브이끼리 키스하는 모습이라거나, 태권브이가 립스틱을 바르는 조형물을 만드는 작가에게 이런걸 맡겨서는 안되겠죠.
이건 '키스'라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품의 좋고 나쁨을 평가할 수야 없지만 태권브이를 희화 시키는 작가가 만든 유머러스한 작품 '트럼펫 부는 태권브이'를 독도에 전시한다니 농담이라도 아주 기분 나쁜 농담이어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네요.
더구나 '태권브이 독도에 서다'라는 저 프로젝트 명 또한
사실 '건담 대지에 서다'라는 일본의 건담 30주년 맞이 건설 프로젝트명을 따온 것이고, 이는 기동전사건담 1편의 부제이기도 합니다.
이 프로젝트가 설마 끝까지 진행될리야 없겠지만,
70년대부터 남의 것을 베끼는게 당연하고 나쁠게 없다는 식의 안일한 사고방식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 내려오고 있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어 마음이 뒤숭숭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