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만에 집을 정리하다 보니 이런게 나왔다.
당시는 최첨단의 사람들만 받는 편지였는데
이런거 알랑가 몰라. ^^
잠이 안와 떠오르기 시작한 생각의 고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잠을 방해하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잠이 안오는 김에 이 종이에 대해 떠올려보자면.
1990년은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였을 뿐 아니라,
PC통신, 그러니까 코텔의 전신인 케텔과 피씨서브의 전신인 피씨밴이 한창 대중화 되던 때다. 요즘에 인터넷을 시작하신 분들이라면 하이텔과 천리안의 전신이라고 해야 알 수 있으려나.
'대중화'라고 해봐야 한 2000여명 가입했을때니 지금 인터넷 인구의 1만분의 1정도 되겠다. 서점에서 컴퓨터 코너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면 "저, PC통신 하시나요? 아이디는 어떻게 되시죠?" 이런 식으로 묻는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낮에 만난 이를 채팅에 초청해서 '오늘 낮에 만났던 아무개 입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이런식의 얘기를 나누는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채팅방 개념도 없이 1:1 채팅이었으니 예의를 지켜야 하는건 당연했고.
내가 왜 저 시절이 1990년임을 기억하느냐면 채팅할때마다 상대는 거의 대학생이었으므로 그들에게 맞추기 위해 90학번이라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등학교 90학번이긴하니 엄밀히 말하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렇게 당시 또래들은 대부분 어리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거나 좌충우돌 기존 질서와 충돌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또 나름대로 뭉쳐서 놀기도 했고, 당시 인연이 끈질기게 최근까지 이어진것도 여럿이다.
어쨌건 처음 케텔에 가입하려면 무려 팩시밀리를 통해서 아이디 패스워드를 보내야 했는데, 문방구에서 우연히 발견한 노트에 적힌 영문을 보고 whynot을 적었고, 패스워드는 나중에 엠팔(EMPAL) 아이디인 nobel로 변경한 흔적이 있다. 잊어먹지 않으려고 저렇게 써놨나보다.
EMPAL 아이디는 왜 nobel이 됐느냐면 엠팔은 심지어 전화통화로 아이디를 불러주면 가입시켜주는 방식이었는데, 상대방은 TV에도 나오는 엠팔 운영자였고 어린 나는 벌벌 떨면서 별다른 영어를 떠올리지도 못한 채 눈앞에 있는 Nobel 표 스텐드의 이름을 불러줬기에 그렇게 됐던 기억이다.
여튼 저렇게 시작된 PC통신의 인연으로 나중엔 홍대의 '통신까페'에도 나갔고(까페 이름이 진짜 '통신까페'다), 그 유명한 Spark 박순백님도 먼 발치에서나마 만나게 됐다.
PC통신을 왜 하느냐며 주변에서 찌질하다 소리를 듣기도 했고, 쓸데없는짓 한다고 아버지께 혼나기도 했지만 PC 통신만큼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친것도 없다.
몇해 지나선 PC통신에서 처음으로 동호회도 조직해봤고, 미숙하나마 글을 쓰기 시작해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도 글을 냈다. 안철수님이 최초의 '백신'을 기고했던 그 잡지는 개발자를 꿈꾸던 우리들 사이에선 지금으로 치면 '네이처'지 처럼 생각되던 그런 잡지였다. 당시는 최초의 바이러스인 (c)Brain 이 국내 유통됐을 때인데 처음 '백신'이 공개될 때는 잡지에 인쇄된 소스코드를 일일히 입력해야 해서 참 곤란했다. 바이러스에 걸렸다면, 짧게 잡아도 4~5시간은 코드 입력을 해야 고칠 수 있었던 상황. 물론 한번 입력해두거나 입력한것을 친구로부터 구하면 좋았다. 나중엔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서 디스크를 판매했는데, 백신이 들어있는 디스크는 당연히 품귀였다.
당시는 이 코드에 V3(3번째 백신이라는 뜻) 같은 이름은 당연히 없었고 '백신' 그 자체가 소프트웨어 이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이러스 치료제는 안티-바이러스로 불린다. 백신이 지금은 대명사처럼 돼 있지만 안티-바이러스 소프트웨어에 백신이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건 안철수씨였다. 3M 스카치처럼 등록상표화 할 수도 있을텐데 그러지 않았다.
나중엔 월간 소프트월드에서 아르바이트도 했고 사람들도 만났다. 수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이일경씨를 만난것도 곽동수님을 처음 만난것도 그때였다.
고등학교 3학년때는 '저는 PC통신을 하나도 모르는데요'를 함께 썼고
대학교 1학년때는 '안녕하세요 한글워드 6.0'을 썼다.
몇권 책을 쓰면서 풍족해진 나는 부모님 허락없이 대우자동차 티코를 몰래 샀고, 자동차의 모든 부분을 DIY하면서 차를 알게됐다.
인터넷이 시작되면서 삼성SDS에 학교홈페이지구축TF라는 팀에 계약직으로 근무하게 됐고,
나중엔 이 경력으로 해외자본(벨기에의 한국분) 투자를 받아 7명이 근무하는 웹개발업체를 만들게 됐다.
2억원을 벌었지만 3억원을 쓴 끝에 웹 회사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회사를 운영해본 경력 덕에 여러가지 잡다한 일을 다 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성공적인 웹사이트들을 뚝딱 만들어내는 기획자가 됐고, 내가 기획한 웹사이트 '조선닷컴 카리뷰'의 기자가 되고,
경향닷컴의 자동차 기자로 불려가고,
지금은 작은 자동차 매체의 취재부서를 맡게 됐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냥 버려지는 시간은 없었다. 모든 일들은 역사로 켜켜이 쌓여 연관을 갖고 움직여왔다.
돌이켜보면 저 작은 종이가 23년이 지난 지금의 나를 자동차 기자로 만든 셈.
한장의 종이가 참 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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